한국 기독교 루터회에서 발행하는 '우리 루터란'이란 작은 계간지 책자에서 본 글인데,
(이번 봄호) 자살에 관련해 봤던 어떤 글보다 공감가는 내용이 많아서 한번 올려 봅니다.
라고 써져있는글을 모사이트 게시판에서 퍼왔습니다..
상당한 스크롤의 압박이지만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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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심심해지면 자동차 번호판을 기웃거린다.
3자나 7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놈의 4자만 보면 죽은 쥐라도 본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4, 죽음.
피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외면하고 싶은 그 그림자. 그러고 보니 이제 4월이다.
잔인하게 아름다운 봄 내음 속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발로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 헤매고,
급기야는 그 속으로 몸과 마음을 통째로 집어던지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자살. 무슨 이유에서든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잃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몇 주 전에도 한 꽃다운 생명이 안타까이 스러져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아직도 인터넷이라는 매개체 속에서는 ‘자살’이라는 것이 모종의 신드롬처럼 퍼져 나가고,
급기야 사회는 그 사람들을 범법자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할 일도 무지하게 많을텐데, 바쁘신 공권력까지 투입되어 자살할 사람들,
예비 범죄자들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단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 또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분명한 범죄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자살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공공의 안녕 질서가 저해되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설령 그런게 있다손 쳐도 한 개인이 그야말로 ‘죽을 결심을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사회의 안녕’까지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속된 말로, 먹고 살 게 없어서 죽겠다는 사람이 은행 금고를 털겠다고 작심을 하는 것보다,
실연의 충격으로 죽겠다는 사람이 상대방 집에 불지른다고 엄포하는 것보다,
세상을 비관한 사람이 지하철에 폭탄 테러를 가하겠다고 덤비는 것보다,
그저 나 하나 조용히 사라져 주겠다는 ‘자살’이 훨씬 더 ‘사회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
‘죽을 각오로 살면 못 할 게 뭐 있냐’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게 ‘자살’이 범법이어야 할 이유는 못 된다.
‘죽을 각오로 악착같이 살겠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든 피해를 보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는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만일 누군가가 죽을 작정을 했다면, 그것은 그에게 삶의 욕망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삶의 욕망을 죽음의 의지가 압도한 결과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반드시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삶의 욕망을 지탱하지 못하도록 몰아간 누군가가 있다.
정 ‘자살’이 못마땅하다면 그들을 ‘자살’로 몰아가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우선될 일이지,
그건 나 몰라라 하면서, 끝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만을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자살하는 사람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이유도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좀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내 가족만 살기 위해 누군가를 더욱 극심한 절망으로 몰아간 적은 정말 없는가.
당신에게 누군가의 ‘자살’을 비난할, 혹은 그것을(당신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권력’의 힘까지 빌어
단죄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장가 못 간다고 농약을 마시는 농촌 총각이 그까짓 색시 하나 없다고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파트 옥상에서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는 파릇한 중․고등학생들이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 고통이 손톱만큼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다.
‘자살 권하는 사회’는 내버려둔 채, ‘자살하는 사람’들만 나무라는 그 오만함.
그 비겁한 오만함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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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호) 자살에 관련해 봤던 어떤 글보다 공감가는 내용이 많아서 한번 올려 봅니다.
라고 써져있는글을 모사이트 게시판에서 퍼왔습니다..
상당한 스크롤의 압박이지만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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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심심해지면 자동차 번호판을 기웃거린다.
3자나 7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놈의 4자만 보면 죽은 쥐라도 본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4, 죽음.
피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외면하고 싶은 그 그림자. 그러고 보니 이제 4월이다.
잔인하게 아름다운 봄 내음 속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발로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 헤매고,
급기야는 그 속으로 몸과 마음을 통째로 집어던지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자살. 무슨 이유에서든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잃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몇 주 전에도 한 꽃다운 생명이 안타까이 스러져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아직도 인터넷이라는 매개체 속에서는 ‘자살’이라는 것이 모종의 신드롬처럼 퍼져 나가고,
급기야 사회는 그 사람들을 범법자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할 일도 무지하게 많을텐데, 바쁘신 공권력까지 투입되어 자살할 사람들,
예비 범죄자들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단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 또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분명한 범죄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자살자가 많아진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공공의 안녕 질서가 저해되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설령 그런게 있다손 쳐도 한 개인이 그야말로 ‘죽을 결심을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사회의 안녕’까지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속된 말로, 먹고 살 게 없어서 죽겠다는 사람이 은행 금고를 털겠다고 작심을 하는 것보다,
실연의 충격으로 죽겠다는 사람이 상대방 집에 불지른다고 엄포하는 것보다,
세상을 비관한 사람이 지하철에 폭탄 테러를 가하겠다고 덤비는 것보다,
그저 나 하나 조용히 사라져 주겠다는 ‘자살’이 훨씬 더 ‘사회의 안녕’에 도움이 된다.
‘죽을 각오로 살면 못 할 게 뭐 있냐’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게 ‘자살’이 범법이어야 할 이유는 못 된다.
‘죽을 각오로 악착같이 살겠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든 피해를 보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는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만일 누군가가 죽을 작정을 했다면, 그것은 그에게 삶의 욕망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삶의 욕망을 죽음의 의지가 압도한 결과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반드시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삶의 욕망을 지탱하지 못하도록 몰아간 누군가가 있다.
정 ‘자살’이 못마땅하다면 그들을 ‘자살’로 몰아가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우선될 일이지,
그건 나 몰라라 하면서, 끝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만을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자살하는 사람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이유도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좀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내 가족만 살기 위해 누군가를 더욱 극심한 절망으로 몰아간 적은 정말 없는가.
당신에게 누군가의 ‘자살’을 비난할, 혹은 그것을(당신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권력’의 힘까지 빌어
단죄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장가 못 간다고 농약을 마시는 농촌 총각이 그까짓 색시 하나 없다고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파트 옥상에서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는 파릇한 중․고등학생들이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 고통이 손톱만큼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다.
‘자살 권하는 사회’는 내버려둔 채, ‘자살하는 사람’들만 나무라는 그 오만함.
그 비겁한 오만함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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