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의 뒤 , 일본은 , 지금의 서울에 관공서를 두어 , 한국(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하게 했습니다. 한국의 사람들은 , 넓게 반대 운동을 일으켜 , 1909년에는 이토히로부미가 한국의 청년 안중근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로부터)
일본의 최초의 수상 ,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포박 되어 동료와 뤼순의 형무소에 보내졌습니다. 안의 감시역이 되었던 것이 , 관동군( 구만주에 있던 일본군) 상등병으로 , 헌병이기도 한 千葉十七(Chiba Toushichi) 이었습니다. 그 날로부터 안의 사형이 집행되는 다음 해 3월26일까지의 5개월간에 , 두 명은 나라와 민족의 차이를 넘고 인간적인 친교를 쌓아 올렸습니다.
왜 , 치바는 미워해야 할 암살자안과의 사이에 친교를 맺을 수가 있었는지요.
치바도 처음은 정의감과 순수한 애국심으로부터 , 안에 격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 치바는 안이 조사해에 당당히 대응하고 , 이토 개인에게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 지배의 그릇됨을 15조에 걸쳐서 호소하고 있는 것 , 그리고 , 스스로의 행위는 국가를 사랑하기때문에 일으킨 거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 그 주장을 증명하는것 같이 , 옥중에서의 안중근 등은 , 항상 솔직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건 후 , 1개월이 지났을 무렵 , 치바는 안이 말하는 일본의 죄상이 사실이라면 , 안의 행위는 「거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은 자신이 안의 입장이라면 ,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인가 , 라고 하는 자문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왜냐하면 , 안이 「나라의 평화롭다고는 , 궁핍해도 사람들이 독립해 살아가는 것이야」라고 치바에 말했기 때문에입니다. 그리고 , 치바는 자신의 고향 미야기를 생각해 , 궁핍한 농촌이면서 사람들은 사이 좋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거기에 비교하고 안의 나라는 국가로서의 몸을 잃어 ,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에 깨달았습니다.
다음 해 , 2월14일에 사형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안은 공소하지 않았습니다. 안의 어머니가 「당신의 죽음은 , 당신 한 명만의 것이 아니고 , 한국민 노여움을 떠맡고 있습니다. 공소를 하면 , 그것은 살려 달라고 애원함이 되어 버립니다」라고 한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입니다.
치바는 이것을 알아 , 안의 거사와는 「개인」은 아니고 「한국민」으로서의 조국을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 같은 국가에의 자랑을 가지는 한 명으로서 안에 사과하고의 말을 말해 고개를 숙였던 것입니다.
처형일 , 안의 치바의 호의에 대해서를 보냈습니다. 거기에는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귀국후 , 치바는 안의 명복을 비는 날들을 보내 , 이 편지를 평생 소중히 했습니다. 안의 행위를 치바와 같이 이해한 일본인은 없었습니다만 , 두 명의 우정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모토미야무헌」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후지오카 노부카츠(도쿄대학 교수)/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산케이신문사 1996
일본의 최초의 수상 ,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포박 되어 동료와 뤼순의 형무소에 보내졌습니다. 안의 감시역이 되었던 것이 , 관동군( 구만주에 있던 일본군) 상등병으로 , 헌병이기도 한 千葉十七(Chiba Toushichi) 이었습니다. 그 날로부터 안의 사형이 집행되는 다음 해 3월26일까지의 5개월간에 , 두 명은 나라와 민족의 차이를 넘고 인간적인 친교를 쌓아 올렸습니다.
왜 , 치바는 미워해야 할 암살자안과의 사이에 친교를 맺을 수가 있었는지요.
치바도 처음은 정의감과 순수한 애국심으로부터 , 안에 격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 치바는 안이 조사해에 당당히 대응하고 , 이토 개인에게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 지배의 그릇됨을 15조에 걸쳐서 호소하고 있는 것 , 그리고 , 스스로의 행위는 국가를 사랑하기때문에 일으킨 거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 그 주장을 증명하는것 같이 , 옥중에서의 안중근 등은 , 항상 솔직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건 후 , 1개월이 지났을 무렵 , 치바는 안이 말하는 일본의 죄상이 사실이라면 , 안의 행위는 「거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은 자신이 안의 입장이라면 ,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인가 , 라고 하는 자문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왜냐하면 , 안이 「나라의 평화롭다고는 , 궁핍해도 사람들이 독립해 살아가는 것이야」라고 치바에 말했기 때문에입니다. 그리고 , 치바는 자신의 고향 미야기를 생각해 , 궁핍한 농촌이면서 사람들은 사이 좋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거기에 비교하고 안의 나라는 국가로서의 몸을 잃어 ,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에 깨달았습니다.
다음 해 , 2월14일에 사형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안은 공소하지 않았습니다. 안의 어머니가 「당신의 죽음은 , 당신 한 명만의 것이 아니고 , 한국민 노여움을 떠맡고 있습니다. 공소를 하면 , 그것은 살려 달라고 애원함이 되어 버립니다」라고 한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입니다.
치바는 이것을 알아 , 안의 거사와는 「개인」은 아니고 「한국민」으로서의 조국을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 같은 국가에의 자랑을 가지는 한 명으로서 안에 사과하고의 말을 말해 고개를 숙였던 것입니다.
처형일 , 안의 치바의 호의에 대해서를 보냈습니다. 거기에는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귀국후 , 치바는 안의 명복을 비는 날들을 보내 , 이 편지를 평생 소중히 했습니다. 안의 행위를 치바와 같이 이해한 일본인은 없었습니다만 , 두 명의 우정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모토미야무헌」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후지오카 노부카츠(도쿄대학 교수)/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산케이신문사 1996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좋은 일들..
일제에서도 개인으로 본다면 나치때의 쉰들러처럼, 반드시 의인도 있기 마련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