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앞 거리는 공사중.

by firecreast posted May 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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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청을 찾아갔던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다.

표정에선 당연하다는 듯 체념으로 이미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처럼 보였지만

바닥을 내려보는 눈빛에선 도저히 분을 삭힐 수 없다.

듣지 않아도 얘기는 뻔한 것이지만 한 가족으로서 물어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어떻게 됐어요?”
“뭐가 어떻긴. 유X 그 사기꾼, 아주 배가 쳐 불렀어.”


4월 초부터 있었던 일이다.

우리 가게 앞 도로에 중장비들이 줄을 서더니 마구 갈라놓기 시작했다.

다소 소란스러운 느낌에 나는 밖으로 나가 관계자로 보이는 분을 붙잡고 물어봤다.

들어본 즉, 내년 6월까지 수도관 확장 공사를 한다고 했다. 아랫마을의 침수를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아랫마을이 넘치면 아랫마을 수도관을 넓히면 될 것이지 왜 공사를 여기서 하는지.


여기까지만 적으면 꼭 내가 소음이 싫어 나라에서 하는 복지사업에 딴지를 거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곳은 장사를 하는 곳이다.

이 가게 앞 도로는 꽤 오래된 곳이다. 길이도 길고 버스 정류장은 세 개나 된다.

그 정류장들이 공사에 의해 아랫마을 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정류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거리가 조용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리가 조용해지는 것은 가게거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생존권에 관련된 문제였다.


이 거리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모였다.

다들 절박한 표정이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다.

구청에 가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애초에 아랫마을에 수도공사를 하지 않은 것도

실은 아랫마을 쪽에 구청이 운영하는 주차장이 길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사를 하자면 이 주차장 기능을 정지해야 되는데, 그럼 구청에서 매년 받던 수익에 지장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가게 쪽 거리에 공사를 하는 것이다. 정부기관과의 싸움이다. 승산이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곳은 공청회장이다. 저쪽에서 구청장이 걸어왔다.

옆에는 명예구청장이라는 웃기는 이름을 한 산부인과 원장
(이 녀석 분명히 몇 년 뒤에 출마한다. 지금은 일종의 구청장 수업중이다.)이

구청장 어께에 있는 먼지를 털어주고 있었다.

구청장이 들어오자 자리를 메우고 있던 부하직원들이 소문으로만 듣던 90도 인사를 한다.

난 90도 인사는 조직에서만 하는 건 줄 알았다.


난 구청장이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시민들 달래는(실은 속이는 거지만), 그런 포퍼먼스를 취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구청장님(?)을 선거 때의 이미지로만 봤다.

구청장은 우리가 모여 있는 쪽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래의 문장은 과장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실은 나중에 법정으로 가게 될 일이 생길까봐 미리 녹음해왔다.


“자네들이 왜 왔는지 내 잘 알지. 수도 크게 해서 물 안 넘치게 해준다는데 왜 말들이 많나?”

“넘치는 곳은 아래쪽인데 왜 여길 손보는 겁니까?”

“그거야 수지타산을 생각해보니 여기가 더 싸게 먹히니까 그렇지.”

“지금 공사하는 길은 우리 상인들의 생존이 걸린 그런 중요한 길입니다. 미리 공청회라도 열어야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미 지난 공청회 얘기는 그만하지. 그나저나 자네들은 생존권이라고 하지만
우린 아랫마을 사람들의 생명권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야. 그렇게 이해심이 없어서야 쓰나?”

“생존권이랑 생명권은 뭐가 다릅니까… 저희는 구청장님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 길을 부탁드려보려 온 겁니다. 구청장님은 구의 어른 아니십니까?”

“허어… 이 답답한 사람들아. 공사 2년 정도 한다고 누가 죽나? 정 억울하면 변호사 선임해서 오라고.
내가 그리 한가한 줄 아나. 정 그러면 지금 공사하는 거리를 다 사가란 말야! 아무 말 안 할테니까.”


그렇다.

수도관을 넓히는 것은 이 동네 주민의 복지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 거리에서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고작 300여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단위를 크게 봤을 때 분명 이 거리의 사람들이 이기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 거리의 사람들도 이곳의 시민이다.

비록 가난한 거리의 가로등 아래서 내일의 생계를 걱정하며 살지만

단 돈 10원이라도 훔치지 않고 나라에 세금 꼬박꼬박 납부한 그런 시민이다.

적어도 철거민처럼 ‘이제 이곳은 가게의 기능을 상실하는 거리가 되니 떠나주세요.’ 하며

경고라도 해 줬으면 그나마 좋지 않았을까.

이 곳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어 굶어야 할까.

자문을 구해 봐도,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6월의 함성이 만들어 낸 참여정부의 복지국가, 우리 대한민국의 놀라운 시스템과 힘이 지금 또 사람을 죽이고 있다.